The Odyssey(오디세이) 리뷰: 고향은 장소가 아니라 내가 끝까지 붙잡는 정체성이다

Summary

  • 크리스토퍼 놀란의 The Odyssey(오디세이)는 거대한 모험담처럼 보이지만, 가장 오래 남는 질문은 “나는 어디까지 이미 정해진 사람이고, 어디부터 내가 겪은 장소와 시간으로 다시 만들어진 사람인가”입니다.
  • 오디세우스가 목숨을 걸고 집으로 돌아가려는 이유는 집이 단순한 주소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집은 기억, 책임, 이름, 사랑, 죄책감, 그리고 끝내 포기하지 못하는 자기 자신이 모여 있는 장소입니다.
  • 고향 도시를 떠난 지 10년을 훌쩍 넘어버린 사람에게도 이 질문은 남습니다. 고향은 물려받는 것일 수도, 선택하는 것일 수도, 새로 만드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변화 속에서도 끝까지 남는 핵심이 있는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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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Odyssey(오디세이)를 보고 나오면 이상하게도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바다가 아닙니다. 거대한 파도, 괴물, 전쟁, 신화적 스케일, IMAX 화면의 압도감이 분명히 있는데도, 영화가 마음속에 남기는 마지막 이미지는 의외로 작습니다. 누군가가 집으로 돌아가고 싶어 한다는 것. 오래 떠돌았고, 많이 변했고, 돌아가면 모든 것이 예전 같지 않을 것을 알면서도, 그래도 돌아가야 한다고 믿는 사람의 얼굴. 그래서 The Odyssey(오디세이)는 모험 영화인 동시에 정체성에 관한 영화입니다.

공식 사이트는 이 영화를 호메로스의 기초적 서사를 IMAX 필름 스크린으로 옮긴 신화적 액션 서사로 소개합니다. 맞는 말입니다. 크리스토퍼 놀란의 영화답게 The Odyssey(오디세이)는 “크다”는 말을 아끼기 어렵습니다. 하지만 좋은 대형 영화는 단지 크게 보이는 데서 끝나지 않습니다. 관객의 아주 개인적인 질문을 크게 만들어 줍니다. 이 영화에서 그 질문은 이것입니다. 인간은 태어날 때 이미 어느 정도 정해진 존재인가, 아니면 떠돌고 다치고 사랑하고 잃어버리는 동안 계속 다른 사람이 되는가.

The Odyssey official banner showing a warrior before the wooden horse
이미지: Universal Pictures 공식 The Odyssey(오디세이) 사이트

왜 오디세우스는 그렇게까지 집에 가려 하는가

오디세우스의 귀향은 낭만적이면서도 조금 이상합니다.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 그는 너무 많은 것을 겁니다. 목숨, 동료, 시간, 명예, 때로는 인간다움까지 위험해집니다. 이 정도면 관객은 묻게 됩니다. 도대체 집이 뭐길래.

집이 그저 편한 침대와 익숙한 식탁이라면, 오디세우스의 집착은 과해 보입니다. 그러나 The Odyssey(오디세이)에서 집은 물리적 장소보다 훨씬 깊은 것입니다. 집은 “내가 누구였는지 기억해 주는 세계”입니다. 우리는 낯선 곳에서 능력 있는 사람이 될 수 있고, 성공한 사람이 될 수 있고, 전혀 다른 이름으로 불릴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고향은 종종 우리를 더 불편하게 압축합니다. 너는 원래 이런 아이였지. 너는 여기서 시작했지. 너는 아무리 멀리 가도 이 냄새와 이 언어와 이 골목을 완전히 버리지는 못하지.

오디세우스가 돌아가려는 곳은 그래서 단순한 목적지가 아닙니다. 그는 이타카라는 장소로 가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오디세우스였다는 사실로 돌아갑니다. 그런데 바로 여기서 영화가 재미있어집니다. 오랫동안 떠돈 사람이 정말 예전의 자기 자신으로 돌아갈 수 있을까요? 아니면 돌아가려는 순간 이미 다른 사람이 되어 있을까요?

정체성은 타고나는가, 만들어지는가

The Odyssey(오디세이)가 던지는 가장 좋은 질문은 “정체성은 원래부터 있는가”입니다. 우리는 자주 자기 자신을 하나의 단단한 물체처럼 생각합니다. 나는 원래 이런 사람이다. 나는 원래 고향을 좋아한다. 나는 원래 이런 성격이다. 하지만 실제 삶은 그렇게 깔끔하지 않습니다. 사람은 직업 때문에 변하고, 도시 때문에 변하고, 사랑 때문에 변하고, 실패 때문에 변합니다. 오래 머문 카페의 조명, 매일 걸었던 출근길, 외국어로 주문하던 순간, 낯선 도시에서 아프던 밤 같은 것들이 천천히 사람을 바꿉니다.

그렇다면 오디세우스는 누구입니까. 트로이 전쟁 이전의 남자입니까. 바다에서 살아남은 남자입니까. 집을 그리워한 남자입니까. 집에 돌아온 뒤의 남자입니까. 이 질문은 영화 속 영웅에게만 해당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오늘의 관객에게 더 직접적입니다. 우리는 모두 크고 작은 오디세이를 삽니다. 대학 때문에, 일 때문에, 돈 때문에, 사랑 때문에, 혹은 그냥 더 넓은 세상을 보고 싶어서 태어난 곳을 떠납니다. 처음에는 떠났다고 생각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떠남이 우리를 다시 씁니다.

재미있는 점은 이 영화가 정체성을 어느 한쪽으로 쉽게 정리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오디세우스에게는 변하지 않는 핵심이 있습니다. 귀향에 대한 의지, 이름을 되찾고 싶은 욕망, 가족과 약속에 대한 감각입니다. 동시에 그는 분명히 변합니다. 고통은 사람을 변화시키고, 긴 시간은 사람을 닳게 하며, 생존은 성격의 모양을 바꿉니다. 결국 영화는 “인간은 본질인가 경험인가”라고 묻고, 둘 다라고 대답하는 듯합니다. 본질은 출발점이고, 경험은 그 출발점 위에 쌓이는 지층입니다.

The Odyssey official poster with a helmeted figure seen from behind
이미지: Universal Pictures 공식 The Odyssey(오디세이) 포스터

고향 도시를 떠난 사람의 오디세이

이 질문이 개인적으로 오래 남은 이유가 있습니다. 나는 내가 자란 고향 도시를 떠난 지 10년을 훌쩍 넘어버린 나이가 되었고, 삶의 꽤 큰 부분을 다른 곳에서 보냈습니다. 이 문장을 쓰는 순간에도 조금 이상합니다. 출발점이 있었다는 사실은 바뀌지 않습니다. 그런데 그 밖에서 살아온 시간도 이제는 내 일부입니다. 그러면 나는 여전히 처음의 나와 같은 사람입니까. 아니면 다른 장소들이 다시 빚은 사람입니까.

고향을 떠난 사람은 두 개의 시간을 동시에 삽니다. 하나는 몸이 실제로 사는 현재의 시간입니다. 출근하는 도시, 자주 가는 식당, 지금 연락하는 사람들, 지금 쓰는 언어와 말투가 있는 시간입니다. 다른 하나는 마음속에 보관된 출발점의 시간입니다. 어린 시절의 바다 냄새, 가족이 부르던 이름, 특정 계절의 습도, 오래된 버스 노선, 다시 가면 별것 아닌데 떠나 있으면 이상하게 커지는 장소들입니다.

고향 도시는 아마도 나를 완전히 설명하지 못합니다. 하지만 나에게서 완전히 빠질 수도 없습니다. 사람은 고향을 떠나는 순간 고향을 잃는 것이 아니라, 이상하게도 더 선명하게 갖게 됩니다. 고향에 계속 살 때는 고향이 배경입니다. 떠나면 고향은 문장이 됩니다. “나는 그 도시에서 왔다.” 이 짧은 문장은 자기소개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작은 신화입니다. 그 안에는 가족, 계절, 말투, 자존심, 피로, 그리움이 다 들어 있습니다.

노마드와 이민자에게 집은 더 복잡하다

The Odyssey(오디세이)가 오늘날 더 흥미로운 이유는 우리 시대가 이동의 시대이기 때문입니다. 디지털 노마드는 도시를 바꾸며 일하고, 유학생은 언어를 바꾸며 성장하고, 이민자는 삶의 기반을 통째로 옮깁니다. 어떤 사람은 스스로 떠나고, 어떤 사람은 어쩔 수 없이 떠납니다. 누구에게는 이동이 자유이고, 누구에게는 이동이 상처입니다. 하지만 두 경우 모두 집이라는 단어는 더 이상 단순하지 않습니다.

집은 물려받을 수 있습니다. 태어난 곳, 가족이 있는 곳, 내가 선택하기 전에 이미 나를 기다리고 있던 곳입니다. 집은 선택할 수도 있습니다. 내가 오래 머물기로 한 도시, 사랑하는 사람이 있는 방, 매일 아침 나를 덜 외롭게 만드는 거리입니다. 그리고 집은 만들 수도 있습니다. 아무 연고 없는 곳에서 반복되는 습관과 관계를 쌓아 올리면, 어느 순간 그곳도 내 편이 됩니다.

하지만 집을 새로 만든다고 해서 오래된 집이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여러 집을 가진 사람은 여러 개의 자기 자신을 갖게 됩니다. 고향의 나, 지금 사는 도시의 나, 낯선 곳의 나, 직장 안의 나, 가족 앞의 나, 혼자 있을 때의 나. 이 모든 버전이 서로 모순되는 것 같지만, 사실 인간은 원래 그렇게 여러 겹입니다. 문제는 그 여러 겹 사이에서 어느 하나를 가짜라고 부르지 않는 것입니다.

The Odyssey official gallery image of a classical sculpture head in smoke
이미지: Universal Pictures 공식 The Odyssey(오디세이) 갤러리

리뷰들이 갈라지는 지점: 스펙터클인가, 감정인가

해외 리뷰와 영화 블로그 반응을 훑어보면 The Odyssey(오디세이)를 둘러싼 논쟁은 대체로 두 방향으로 갈립니다. 한쪽은 이 영화를 고대 서사를 현대 블록버스터 언어로 되살린 대형 영화로 봅니다. IMAX, 육체적 액션, 신화적 이미지, 크리스토퍼 놀란 특유의 구조감이 관객에게 “영화관에서만 가능한 경험”을 준다는 쪽입니다. 실제로 공식 사이트도 이 작품을 전 세계에서 촬영한 신화적 액션 서사, 그리고 새로운 IMAX 필름 기술로 만든 작품으로 설명합니다.

다른 쪽은 조금 더 차갑습니다. 일부 비평은 영화가 너무 거대해서 인간의 감정이 눌린다고 봅니다. 오디세우스의 고통과 그가 만나는 사람들의 슬픔이 스펙터클 아래에서 충분히 숨 쉬지 못한다는 비판입니다. 특히 고전 번역자와 고전학자들이 던지는 질문은 흥미롭습니다. 이 이야기는 원래 영웅의 귀환만이 아니라 기다림, 상실, 여성의 목소리, 폭력의 대가, 연민의 필요성까지 품고 있는데, 영화가 그 모든 복잡함을 충분히 살렸느냐는 것입니다.

나는 이 논쟁이 오히려 The Odyssey(오디세이)를 더 재미있게 만든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귀향의 이야기는 원래 승리담과 상처담이 동시에 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집으로 돌아가는 사람은 영웅일 수 있지만, 동시에 너무 많이 잃은 사람입니다. 돌아왔다는 사실은 감동적이지만, 돌아오기 전의 시간이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이 영화를 단순히 “위대한 영웅의 귀환”으로만 보면 얕고, “감정이 비어 있는 대형 영화”로만 보면 또 아깝습니다. 그 사이에 더 맛있는 질문이 있습니다. 인간은 왜 그렇게까지 자신이 시작된 곳으로 돌아가고 싶어 하는가.

집은 장소인가, 관계인가, 기억인가

나이가 들수록 집은 더 이상 한 가지가 아닙니다. 어릴 때 집은 주소였습니다. 학교 끝나고 돌아가는 곳, 밥 냄새가 나는 곳, 내 물건이 있는 곳. 그런데 성인이 되면 집은 점점 관계가 됩니다. 나를 기다리는 사람이 있는 곳, 내가 말을 덜 꾸며도 되는 곳, 실패한 얼굴로 들어가도 완전히 설명하지 않아도 되는 곳입니다.

그리고 더 시간이 지나면 집은 기억이 됩니다. 실제로 돌아갈 수 없는 집도 있습니다. 가족이 이사했고, 동네가 변했고, 가게가 사라졌고, 예전의 나는 더 이상 없습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그곳을 집이라고 부릅니다. 왜냐하면 집은 현재형만이 아니라 과거형으로도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오디세우스가 찾아가는 집도 완전히 현재의 집은 아닐지 모릅니다. 그는 이타카로 돌아가지만, 동시에 자신이 떠나기 전 믿었던 세계로 돌아가고 싶어 합니다.

하지만 영화가 잔인하게 보여주는 것은 이것입니다. 돌아간다고 해서 시간이 취소되지는 않습니다. 고향은 우리를 받아줄 수도 있지만, 우리가 떠나 있는 동안 고향도 변합니다. 가족도 변하고, 나를 기다리던 사람도 변하고, 나 자신도 변합니다. 결국 귀향은 과거로 돌아가는 일이 아니라, 변한 내가 변한 집과 다시 만나는 일입니다. 그래서 귀향은 따뜻하면서도 무섭습니다.

귀향이 마음에 남기는 것

고향과 정체성의 문제는 추상적인 철학에 머물지 않습니다. 사람은 자신이 어디에서 왔는지, 지금 어디에 속해 있는지, 앞으로 어디로 가고 싶은지 설명할 수 있을 때 조금 더 안정됩니다. 반대로 그 설명이 완전히 끊기면, 아무리 좋은 도시와 좋은 직업을 가져도 이상한 공허감이 생깁니다.

노마드와 이민자, 장기 해외 거주자, 고향을 떠난 직장인에게 흔한 감정이 있습니다. 어디에도 완전히 속하지 못한다는 느낌입니다. 고향에 돌아가면 내가 너무 변한 것 같고, 지금 사는 곳에서는 아직 완전히 뿌리내리지 못한 것 같습니다. 이것은 실패가 아닙니다. 이동하는 삶의 자연스러운 심리적 비용입니다. 다만 이 감정을 무시하면 외로움이 되고, 잘 들여다보면 자기 이해가 됩니다.

The Odyssey(오디세이)가 주는 위로는 “언젠가 완벽한 집에 도착한다”가 아닙니다. 오히려 더 현실적인 위로입니다. 사람은 변해도, 완전히 흩어지지는 않는다는 것. 떠난 곳과 머문 곳과 잃어버린 것과 새로 얻은 것이 모두 한 사람 안에 남아, 조금 더 복잡하지만 조금 더 넓은 자아를 만든다는 것. 이것은 꽤 온전한 관점입니다. 정체성은 하나의 순수한 원석이 아니라, 여러 장소를 지나며 깎이고 붙고 다시 빛나는 모자이크에 가깝습니다.

The Odyssey official gallery image of the film poster artwork
이미지: Universal Pictures 공식 The Odyssey(오디세이) 갤러리

고향을 떠난 지 10년을 훌쩍 넘기고 다시 묻는 출발점

고향을 떠난 지 10년을 훌쩍 넘어버린 시점은 이상합니다. 아주 잠깐 떠나온 것처럼 말하기에는 시간이 너무 많이 흘렀고, 그렇다고 모든 것이 완전히 정리됐다고 말하기에는 아직 삶이 계속 움직입니다. 오래전의 선택들이 어느 정도 결과로 돌아오기 시작하지만, 아직 삶 전체를 결정했다고 보기에는 너무 이릅니다. 그래서 이런 시기에는 자주 뒤를 돌아보게 됩니다. 나는 어디에서 왔고, 왜 여기까지 왔고, 지금의 나는 그때의 나와 얼마나 같은가.

고향 도시를 떠나 다른 곳에서 시간을 보낸 사람에게 The Odyssey(오디세이)는 단순한 신화 영화가 아니라 이상하게 개인적인 거울이 됩니다. 오디세우스처럼 괴물과 싸우지는 않았지만, 우리도 나름의 바다를 건넜습니다. 낯선 도시에서 처음 길을 잃었던 날, 익숙한 말투를 숨겼던 순간, 고향 친구와 대화가 조금씩 어긋나던 밤, 부모님의 시간이 내 시간보다 빨리 흐르는 것을 느끼던 날. 이런 것들도 작지만 확실한 모험입니다.

그리고 어느 순간 깨닫습니다. 고향으로 돌아가는 일보다 더 어려운 것은, 내가 고향을 떠나며 변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일입니다. 변한 내가 배신자는 아닙니다. 다른 도시에서 배운 언어, 습관, 취향, 태도도 모두 나입니다. 동시에 고향에서 시작된 나도 여전히 나입니다. 인간은 하나의 순혈 정체성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여러 시간의 혼합물로 삽니다.

그래서 집은 어디에 있는가

The Odyssey(오디세이)를 보고 난 뒤 내 대답은 조금 바뀌었습니다. 집은 한 곳에만 있지 않습니다. 하지만 아무 곳이나 집이 되는 것도 아닙니다. 집은 내가 반복해서 돌아가고 싶은 곳, 혹은 돌아가지 못해도 계속 나를 설명하는 곳입니다. 집은 나를 편하게 해 주는 곳일 수도 있고, 나를 가장 아프게 하는 곳일 수도 있습니다. 때로는 둘 다입니다.

오디세우스가 집을 향해 가는 이유는 아마도 그곳에 답이 있어서가 아닙니다. 그곳에 질문이 있기 때문입니다. 나는 아직 나인가. 내가 잃은 것 뒤에도 나라고 부를 만한 것이 남아 있는가. 내가 떠난 동안 변한 사람들과 다시 만날 수 있는가. 이 질문들은 고대의 바다 위에만 떠 있지 않습니다. 고향 도시를 떠난 사람에게도, 낯선 나라에서 사는 사람에게도, 런던의 유학생에게도, 싱가포르의 직장인에게도, 매년 다른 나라에서 일하는 노마드에게도 똑같이 도착합니다.

결국 The Odyssey(오디세이)는 귀향의 영화이지만, 더 깊게는 자기 자신과 다시 약속하는 영화입니다. 나는 변했다. 그러나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았다. 나는 떠났다. 그러나 출발점을 완전히 잊지는 않았다. 나는 다른 곳에서 새로 만들어졌다. 그러나 그 새로움마저 내 이야기의 일부다. 이 정도의 대답이면 충분히 아름답습니다.

Conclusion

The Odyssey(오디세이)는 보는 동안에는 바다와 전쟁과 신화의 영화처럼 느껴지지만, 시간이 지나면 아주 조용한 문장 하나로 남습니다. 사람은 어디로 돌아가고 싶어 하는가. 그리고 돌아가고 싶다는 마음은 무엇을 증명하는가.

오디세우스의 귀향은 단순한 복귀가 아닙니다. 그것은 정체성의 실험입니다. 집이 나를 만든 것인지, 내가 집을 계속 다시 만들고 있는 것인지 확인하는 과정입니다. 고향을 떠난 지 10년을 훌쩍 넘겨버린 사람에게, 여러 도시 사이에서 자기 자신을 잃지 않으려는 사람에게 이 영화는 꽤 다정한 질문을 남깁니다. 당신은 변했습니다. 그런데 그 변화 속에서도 아직 당신이라고 부를 수 있는 무언가가 남아 있습니까.

나는 있다고 믿고 싶습니다. 그것은 혈통이나 주소처럼 고정된 것이 아니라, 계속 선택하고 돌보는 방향에 가깝습니다. 집은 물려받을 수 있고, 선택할 수 있고, 만들 수 있습니다. 정체성도 그렇습니다. 우리가 어디에서 왔는지는 중요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어디를 계속 마음속 집으로 부르기로 하는지도 그만큼 중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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